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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소비문화 - 냐냐로까 스님

[ H ] 2018. 6. 1.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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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소비문화 
냐냐로까 스님

인터넷에서 보고 너무 좋은 내용이라 에버노트에 저장해두고 종종 보는 글이다. 얼마나 소비사회에 길들여져서 필요없는 것들을 사고 이미지에 현혹되서 살고 있는 지 한 번쯤 생각해볼 내용이다. 



현대사회를 ‘소비사회’라고 합니다. 현대사회는 “이 시대를 살려면 사라”고 암암리에 외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영어의 ‘buy’와 ‘live’는 우리 말로 ‘산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삶의 한가운데에 ‘쇼핑’의 퍼포먼스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사회적ㆍ감성적 측면에서 욕망을 필요로 하고, 그 욕망을 일부러 자극하여 ‘쇼핑’의 창으로 끌고 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직접 혹은 간접으로 우리 삶을 깊숙이 콘트롤하고 있는 인터넷의 본질적인 구조도 ‘사라’, ‘쇼핑하라’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쇼핑을 하고 싶은 이유는 

첫째는 소유에 대한 욕망이며, 둘째는 쇼핑과 소비를 통하여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의식이며, 셋째는 ‘나 자신 또는 내 생활에 뭔가 빠져 있다’는 어렴풋한 결여 의식이며, 넷째는 지루함을 해결해보려는 것 등등이 있습니다. 


영국 심리학자인 애덤 필립스는 존재 의식과 결여 의식과 지루함에서 오는 안절부절 못하는 지루함의 상태를 ‘열망의 대기 상태’라고 부릅니다. 소비의 세계는 이런 막연한 열망에 수백만 개의 구체적 이름을 붙여 소비를 부추깁니다. 스마트 폰, 아이팟, 펠트 자전거, 앙코르 왓 여행, 삼성 카드, K5 자동차, 엘지 옵티마스 등등. 그런데 현대 소비사회의 구조 속에 ‘브랜드’가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 소비사회생활은 집안 생활에서나 직장에서나 휴식을 취하려 할 때조차도 어떤 식이든 ‘브랜드’와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어 파묻혀 있다는 것입니다. 브랜드는 오늘 날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의 중심에 있다고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시대에 떨어진 사람이라는 평들 듣고 싶지 않다면 브랜드들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갖추어야 합니다. 


소비를 부추기는 브랜드  


브랜드는 기업에게 있어서는 투자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소유권의 증표로서 기능합니다. 기업은 광고와 마케팅 활동을 통해 상품의 효용 가치를 홍보함으로써 자사의 브랜드가 품질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게끔 하며, 이로써 상품의 가격이 결정됩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브랜드는 상품의 출처를 보증함으로써 그 상품이 시장의 다른 상품들과 구별하게 해줍니다. 이러한 보증을 근거로 소비자는 생산자에게 상품의 품질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고, 상점의 선반에서 선택을 하고자 할 때 신속한 구매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 브랜드는 로고나 포장 디자인만이 아니라 소비자의 마음속에 어떤 상품에 대해 아는 바와 느끼는 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도록 해주는 정신적인 틀의 역할을 합니다. 즉 기업은 브랜드를 통하여 그 기업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그 상품이 중요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고객들에게 부합하는 가치와 성격을 확립해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런 관념들을 통해 브랜드는 소비자와 관계를 맺게 되는데 소비자는 단순한 필요를 넘어 열망의 관계로까지 진행되기도 합니다.

기업은 광고를 통하여 브랜드에 이미지를 담는데, 브랜드는 소비자의 보편적 욕구, 즉 자아실현의 추구, 사랑과 낭만에 취하고자 하는 욕구,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욕구, 이타주의 및 공동체 의식에 참여하고픈 욕구 등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매개물이 되는 것처럼 만듭니다. 그리하여 소비자가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소비자 스스로가 자의에 의해 선택한 지성인이 된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하며,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결핍 의식을 만회하게끔 하며 또한 이타주의와 복지에 참여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만들어 자부심을 느끼게 유도합니다. 사람들이 이런 정서적 욕구들이 충족되기를 기대하면서 브랜드 제품을 삽니다. 그러나 정서적 욕구에 대한 호소를 통해 상품을 팔고자 하는 시도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수반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탐욕, 대인기피증, 열등감, 질투심 등의 고질적인 성향을 초래하는데 중요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다른 이들은 모두 나름의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데 자신의 목표는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불안감을 암암리에 더욱 부채질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멋진 삶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을 볼 때 질투심과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내 삶의 진로를 스스로의 힘으로 좌우할 수 없음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둘째, 모두가 자신보다 젊고, 날씬하고, 예뻐 보이는 자괴감이 들 수 있습니다. 허영의 세계과 영상이 만들어 놓은 허구의 미적 기준에 자신을 견줌으로써 열등감, 소외감, 자기비하, 고독감을 느끼게 됩니다. 셋째, 자신이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을 들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식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을 채워주지 못할 때 부모는 불안하고 의기소침해집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것에 대한 보상을 해주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자녀 교육에 있어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을 놓칠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넷째,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을 주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들을 볼 때 스스로를 이기적이고 떳떳치 못하다고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브랜드는 이에 멈추지 않고 소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미지에 빠져버리게 종용합니다.

1.변화하라 

브랜드는 당신에게 ‘그 브랜드의 상품을 사들임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시켜라’ 라고 부추기며, 그 브랜드의 상품을 사면 품위 있는 사람이 되어 자신의 삶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2. 더욱 풍족해 질 것이다 

브랜드는 당신이 그 브랜드의 상품을 사면 ‘더 사들이면 어떤 식으로든 더 풍족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하며 이미지를 만듭니다. 그것을 구입하면 구입할수록 그만큼 더 가난해질 뿐임은 자명한 일인데도, 광고들은 그 브랜드의 무언가를 사면 어떤 식으로든 지금 삶보다는 질이 높은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보이게 되며, 그러면 당신들의 삶은 더욱 풍족해질 것이라고 세뇌합니다.

3. 지금의 불만스러운 삶에서 벗어나라

브랜드는 당신에게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해 불만을 느끼게 만들고는 그 브랜드의 상품을 얻으면 그러한 불안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이미지를 만듭니다.




광고의 시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결국 돈 문제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있으면 많은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한 불안감이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광고가 조장하고 이용하는 불안감은 조금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광고는 자기들이 광고하는 그 상품을 가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존재라는 불안감을 조장합니다.

현대생활은 광고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이 생활 속에서 얻는 지식과 정보는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통로를 통해서 얻는 경우보다는 대부분이 광고를 통해 얻고 있습니다. 브랜드의 광고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간접적이지만 광고는 그것을 교묘하게 포장하여 그 이미지는 소비자들에게 너무나 강력하게 인상 지워져 사람들의 사고와 감정과 행동에 대단한 영향을 미치며, 상당히 오랜 시간에 걸쳐 효과가 지속됩니다. 그런데 광고는 기업이 자기 상품을 다른 경쟁 상품보다 더 잘 팔리게 하기 위한 수단 외에는 달리 그 기능이 없습니다. 광고는 모든 브랜드가 지닌 ‘많이 팔기’라는 공통적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또한 광고 포스터 속 성적 매력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의 황홀한 자태 혹은 조각상 같이 생긴 이색적인 남성의 드라마틱한 포즈는 사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많은 소비자들은 그 광고 속의 여자와 남자를 보면서 암암리에 비참한 열등감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그 여자(남자)만큼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파고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내적 불안감을 만들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무언가를 바꾸지 않는 한 결코 저 여자(남자)가 속한 매우 근사한 삶의 양식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 여자(남자)처럼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저 여자(남자)가 가진 것을 나도 사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이와 같이 역설적이게도 광고가 만들어낸 불안감은 우매한 소비자들에게 우매한 희망을 심어주어, 마치 더 나은 ‘나’를 향해 가는 길을 밝혀주는 것같이 작용합니다. 이것이 광고의 속임수입니다. 소비자는 광고가 만들어낸 불안감이 담긴 독을 그 불안감을 치유해 주는 샘물인 줄 알고 계속 퍼마시게 됩니다. 현대는 자본주의의 산업 시장주의로서 돈의 만능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현대는 소외의 시대이다.’라는 말을 항상 들어왔습니다. 돈을 가지지 못한 자는 소외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위로부터 조금이나마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딘가에 돈과 연관되어 소속되길 원합니다. 광고는 이러한 심리를 이용합니다. 이를테면 중산층 사람이 상류층들이 애용하는 상품을 구입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혹은 상류층이 되었다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류층 사람들은 자신보다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모방합니다. 물질만능주의 현대사회의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자신이 더 높은 계층으로 보이기 위하여 어떠한 대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브랜드가 지닌 허구성

이러한 브랜드가 지닌 허구성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상품은 브랜드가 붙어 있을 때 한층 더 가치 있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기업들에 의해 날조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상품은 브랜드에 상관없습니다. 상점에서 팔리는 순간 그 가치가 반감됩니다. 사실, BMW나 현대차는 고장율의 차이가 없고, 또한 감가상각 속도에 있어 별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중국 내 백만장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고급 브랜드는 BMW이고 루이비통, 메르세데스 벤츠, 롤렉스,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제품의 상당수는 중국에서 생산되어 서구로 수출된 후 500% 가까이 부풀려진 가격에 중국으로 역수입되는 것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품질에 있어서 브랜드 제품에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대하는 바의 그 품질은 그 실제 품질과 반드시 상응하지 않습니다. 고급 제품을 만든다고 알려진 브랜드 상당수가 그보다 더 낮은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브랜드와 동일한 설비와 기술을 이용하여 제품을 생산합니다. 사실, 루이비통 제품은 실상 푸마와 같은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브랜드 제품을 구매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거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누리게 되지는 않습니다. 특히 의류나 화장품 브랜드 광고는 소비자의 개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대량으로 생산되는 제품들에 의해서 나만의 개성을 찾는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품에 부가가치를 더해준다는 과학적 성과가 공인기관에 의해 검증된 경우도 드뭅니다. 실제적으로, 질레트 마하3 면도기의 5중 면도날이 다른 1단 면도날보다 더 피부에 밀착된다거나 안전하다는 사실이 입증된 바 없습니다.

광고는 사실, 속임수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광고는 이 상품을 사기만 하면 더 나은 당신이 된다고 소비자들에게 끊임없이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행위가 자기를 파멸시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행위를 계속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중독자라고 부릅니다. 현대의 대부분의 소비자는 기업의 이러한 속임수 광고에 의해 브랜드 중독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에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과연 바람직한 소비문화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사실,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바람직한 소비습관은 다름 아닌,꼭 필요할 때만 소비하는 것입니다. 광고의 현란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소비에 대한 ‘필요’를 느끼는 긴박감이 줄어듭니다. 소비는 무절제한 욕망이 아닌 실질적 필요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와 같은 필요조차도 교묘하게 조작된 광고 메시지의 실체를 아는 한 상당부분 사라집니다. 우리는 계산대 앞에 설 때마다 스스로에게 ‘정말 내게 이것이 필요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게 된다면 광고는 나의 변화를 강요하고 세뇌시키는 미적 양식이 아닌, 불필요한 지출을 부추기는 천박한 속임수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필요한 것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소박함에 기반을 둔 생활방식에 가치를 두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필요와 소비를 줄이면 자연스레 노동에 투여되는 시간도 감소할 것입니다. 그렇게 얻어진 시간적 여유를 진정한 행복을 위해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의 자유가 확보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 자유를 여태까지 돈을 번다고 제외시켜버린 명상, 진정한 사랑, 음악, 문학, 미술, 요리, 체육 등의 삶의 양식들에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인생에서 ‘성장’하게 되어 삶의 진면목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소박한 삶이라 함은 소비를 완전히 근절하고, 즐김조차 무조건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소비라는 행위로부터 무언가를 덜 기대하라는 의미입니다. 휴대전화는 전화를 걸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며, 비누는 피부를 깨끗이 하려고 쓰는 것이지 우리 자신을 영화배우처럼 탈바꿈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브랜드 역시 같은 원리로 작동합니다. 뛰어난 품질을 갖춘 브랜드 제품을 갖게 된다면 분명 그러한 상품을 소유하는 데서 오는 기쁨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쁨의 차이는 얼마나 되며, 그 차이를 가져오는 데 소요될 비용은 얼마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나의 말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이야기로 들린다면 그 이유는 여러분들이 삶의 현실적인 면에 정통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복잡한 삶을 사는 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요즘같이 저 출산 시대에서 사는 젊은 세대 부모들은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거절하면 나의 아이가 다른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불안해 합니다. ‘나는 왜 루이비통을 불태웠는가’의 저자 ‘부어맨 닐’은 자신이 브랜드에 집착하게 된 동기를 “나는 그날 함께 어울리고 싶었던 아이들로부터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에 휩싸이게 되면 그러한 인식은 어린 아이들에게 걸름 장치 없이 그대로 전이됩니다. 브랜드 선호의 분위기 속에서 ‘닐’은 왕따 당한 자신의 초라한 기분과 감정에 ‘아디다스’라는 브랜드 제품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디다스’라는 브랜드는 왕따를 당했던 당시의 쓰라린 심정과 함께 아디다스가 그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고 단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또래의 동무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것 보다 중요한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가 상징하는 이미지를 이용하며 브랜드를 통해 또래집단과의 소속감을 얻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유명 브랜드 제품들로 계속해서 그 애들에게 인정받으려 애쓰고, 유명 브랜드 제품을 쓰지 않아서 하찮게 보이는 다른 아이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이러한 풍조에 훈련된 아이들이 사회인이 되면 브랜드화 된 사회풍조는 더욱 고착되어 가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아이를 둔 부모들의 자녀들에 대한 교육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자녀들의 성장과 교육을 위해서, 원칙을 고수하여 아이에게 방에 TV를 통제한다든지, 패스트푸드 음식을 금지시킨다든지, 또는 명품의류를 구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백히 해야 할까? 하는 문제의 결정에 항상 주저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단한 신념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어 아이들을 설득시켜야 합니다.

“브랜드 있는 제품이라고 반드시 다 좋은 건 아니란다” “너는 물건 값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 값을 주고 사는 거야” “브랜드 제품이라고 해서 그 돈만큼 가치가 있는 것은 절대 아니야” 그리고 “너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만들어 쓴다면 재미도 있고, 새로운 것을 알 수 있게 되어 더 뿌듯함을 얻게 된단다.” “네가 걸친 브랜드에 눈길을 주는 사람들은, 사실은 네가 진정 어떤 사람이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단다.” “너는 지금 갖고 싶은 것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고 있는데, 찾아보면 다른 것에서 보다 더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꺼야”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사치스런 생활방식에 수반되는 고통이 그러한 삶 속의 쾌락을 압도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바람직한 소비관은 삶에서의 근심과 이기주의 그리고 부채를 없애줄 것이 확실합니다. 이천오백 년 전에 붓다는 실제로 참다운 행복이란 ‘번뇌 없는 평정의 삶’이라고 제시하면서, 모든 생각ㆍ감정ㆍ감각은 실체가 아니고 단지 지나가는 현상일 뿐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소비’하려는, ‘사’려는 모든 마음도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기다려 보세요. 그러면 소멸되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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